본문 바로가기
엄마가 기억을 잃었습니다

[Prologue] 또 다른 나의 특별한 가족

by 비채공켈리 2022. 12. 16.
몰랐다.
젊은 치매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치매도 사랑스럽다는 것을.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자기야.. 우리 엄마가.. 치매래.."
   "나를 못 알아보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은데.. 흑흑"

   

   50대 초반의 나이에 치매 판정을 받는 것은 본인을 비롯한 가족 중에 누구라도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눈물을 보이며 힘들어하는 남자친구와 달리 나는 크게 걱정되는 것이 없었다. 애써 담담해 보이는 나의 모습에 남자친구는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예비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치매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은가? 백이면 백.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친인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은 본인 일처럼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딸도 없고! 아들만 있는 집에 시어머니가 치매면 말 다 한 거 아니야? 다시 생각해봐." "당장은 몰라도 나중엔 다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 될 거야."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걱정 어린 말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머릿속이 복잡할 때가 있었다. 나는 그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예비 시어머니의 치매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까?"
   "응? 무슨 그런 이유가 다 있어?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딨니.. 다 자식들 열심히 키우다가.. 아픈 게 죄도 아니고. 엄마는 그건 정말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엄마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위로를 받은 듯 마음이 한결 따뜻해짐을 느꼈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말을 해줄 것인지를 잘 알기에 전화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성향이 너무 다른 사람이지만 나의 가치관이 가장 닮아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예비 시어머니의 치매 판정에도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치매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결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불과 5년 전 뇌출혈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가족도 못 알아보던 사람이 나의 엄마였다. 당시 담당교수의 의학적 소견으로는 어린 세 딸들의 두려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안타깝지만 몸의 한쪽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나는 비행기로 11시간이 떨어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지내고 있었다. 새벽에 보배(막내)로부터 엄마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 자매 중 맏이인 나의 부재로 보형이(둘째)와 보배(막내)가 아픈 엄마 옆에서 얼마나 두려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잘 지내고 있던 나를 한국으로 부른 건 엄마의 뇌출혈 판정이었다. 한국행 티켓을 예약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엄마가 깨어나기를 기도했다. 얼마 뒤 엄마는 간절한 기도가 쌓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건강을 되찾았다. 담당교수는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결과는 기적이었다. 기존에 있던 뇌출혈 흔적이 잘 안 보인다고 '기적'이라고 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누군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크게 놀라지 않는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

   지금은 예비 시어머니의 치매판정이 그 가족들에게 너무나도 큰 시련으로 느껴질지라도 이 과정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옆에서 도울 수 있도록 나에게 담대한 마음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 줄도 모르겠다.

   지난 5년 간의 기록들과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이 곳에 담아보려고 한다. 부족한 며느리를 사랑해주시는 시댁 식구들과 과거의 남자친구이자 현재의 내 남편에게 너무 감사하다.

   나의 또 다른 특별한 가족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시간이 지나도 기쁨으로 추억되기를 바란다.

   

   God's always good 🙏

댓글